
멈출 만도 하건만, 시 때 없이 솟구치는 이 슬픔의 정체는 뭔가. 나는 이른바 ‘노사모’도 ‘노빠’도 아니다. 심지어 2002년 대선 당시 사표만은 막아달라는 구호를 매몰차게 외면하고, 노무현을 찍지 않은 사람이다. 이유도 모르는 채 한풀이를 하듯 실컷 눈물을 흘리고 나니, 그제야 감정의 실체가 분연히 드러난다. 이 눈물의 정체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당신을 나무랐다는 뼈아픈 후회다. 온전히 나를 위해 살았는데도,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한 채 부모를 떠나보내야 하는 못난 자식의 쓰라린 회한 같은 것. 어리석게도 나는 당신이 떠나고 나서야 당신의 존재를 깨달았다. 지역감정을 청산하겠다는 순전한 희망으로 부산의 한 공터에서 지지자 한 명 없이 연설하고,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악의적 문구를 온 국민이 맘껏 쓰도록 내버려두고, 바보라는 별명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는 정말 바보 같은 사람.
내가 누린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당신의 탈권위적인 희생으로 담보되었다는 것을 망각한 채, ‘체통이 없다’며 입 초시를 떨었던 나의 눈 먼 귀와 입, 그리고 영혼은 자책감에 겨워 좀체 진정이 되지 않았다. 밀짚모자를 쓰고 하회탈 각시처럼 환히 웃으며, 풀밭을 가르며 천진하게 썰매를 타고, 귤 한 개를 슬쩍 자기 호주머니에 감추는 일명 ‘노간지’ 사진들이 머릿속을 주행하자, 속절없이 불어나는 그리움. 그러나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랴. 비로소 죽음 앞에서야 머리를 조아리는, 이 대책 없는 뻔뻔함은 오로지 우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모양이다. 봉하마을에 내려간 것도 그 같은 면죄부의 연장선이었을 것이다.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경남 밀양으로 내려가는 동안, 나와 남편은 거의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5월 23일 그의 충격적인 서거 이후 며칠이 흐르는 동안 남편은 “어떻게 노무현이 죽어”라고 느닷없이 되뇌는 것이 전부였고, 나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황망한 심정으로 뉴스에 시선을 빼앗겼다. 일면식도 없는 명명백백한 타인의 죽음이 이토록 깊은 상처가 되리라곤 우리 둘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나는 노무현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늙고, 병들어 노한으로 죽을 수 있다는 것조차도.
그는 여태껏 내가 보아온 정치인 중에 가장 강인한 사람이었다. 한나라당 텃밭인 부산에 기어코 내려가 3회 연속 출마했고, 틈만 나면 자신을 갈아치우려는 민주당의 몹쓸 용병술에 거침없는 도전으로 맞섰고, 불법 정치 자금의 위력 앞에 조그만 ‘노란 저금통’으로 선거 혁명을 이뤄냈다. 그런 노무현과 죽음은 어울리지 않는다. 남편이 “어떻게 노무현이 죽어”라고 탄식할 때 내가 “그는 자살할 사람이 아니야”라고 항변한 것도 그 때문이다.
밀양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분향소로 가는 도중 나는 전신주에 걸려 있는 수 십 개의 플래카드를 목격하고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입니다’, ‘당신은 영원한 대통령입니다’,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사흘 후, 경상남도의 어느 촌마을, 봉하마을의 평일 오후 3시는 상복을 차려입고 나온 조문객들로 넘쳐났다. 마치 ‘검은 자들의 도시’처럼 국화꽃 한 송이를 들고, 근조 리본을 단 추모의 행렬은 유례없이 길었고, 표정은 숙연했다.
나는 2시간 남짓 기다린 후에야 노무현 전 대통령 영전에 헌화를 할 수 있었다. 눈가가 벌긋벌긋해진 조문객들은 헌화를 하다, 기어코 울음보를 터트렸고, 누군가는 목 놓아 ‘노무현 대통령님’을 불러댔다. 서른 명이 넘는 조문객들이 한 조가 되어 헌화를 하느라 묵념만 해야 했는데, 남편은 용기를 내 절을 했다. 그는 오열하고 있었다. 그제야 깊숙이 밀어두었던 슬픔이 터져 나오는 모양이었다. 남편이 절을 하면서 그의 죽음을 물리적으로 실감했다면, 나는 노무현이 즐겨 먹었다는 소고기 국밥을 분향소 임시 처소에서 추모객들과 함께 먹으면서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가 투신했다는 부엉이 바위와 노무현의 사저는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부엉이 바위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자, ‘상도동에서 온 일반 시민’이라고 밝힌 어느 40대 아저씨는 울분을 감추지 못한 채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보세요. 이게 아방궁입니까? 기자들이 직접 와보고 기사를 쓴 거라면 내가 이렇게 분하지도 않을 겁니다. 이 사저 팔아봤자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도 안 돼요. 나무들도 보세요. 어디 제대로 성한 소나무 한 그루라도 있습니까?” 경상남도 밀양에서 버스로 30분 이상 달려 위치한 봉하마을, 보수언론과 여당 의원에 의해 ‘아방궁’이라 불렸던 노무현의 사저 바로 앞에서 나는 코를 틀어막았다. 시골 촌구석에서나 맡을 수 있는 동물들의 배설물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이라 불렸지만, 핸드폰도 쉬이 터지지 않는 어느 시골 마을에 덩그러니 지어진 집 한 채. 이것이 노무현 사저의 진실이다. 분하다. 억울하다. 애통하다. 그에 관한 한 보수 언론은 지독히도 악랄했다. 진보 언론도 어리석었다. 노무현 서거 즉시 내 머릿속을 관통한 강렬한 하나의 이미지는 <한겨레 21>이 표지로 내세운 노무현의 쓸쓸한 뒷모습 그리고 ‘굿바이, 노무현’이라는 카피다. 노무현은 철저히 혼자였다. 그의 죽음 앞에 당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보, 정의, 도덕, 통합 등 그 모든 불가능한 화두를 그에게 떠밀어 넘겼지만, 그에 제대로 공조한 자는 없다. 노무현 홀로 대한민국의 위대한 신화를 써내려가기를 바랬던 것일까. 그에게 이토록 악의적인 언론과 정치권, 그리고 국민들을 그가 일일이 다 설득해가면서 말이다.
봉하마을에서 분향을 하고 난 뒤, 나는 서울에서 그의 영결식을 맞았다. 노란 모자, 노란 리본, 노란 포스터로 뒤덮인 서울 광장에는 슬픔이 아니라 고통으로 가득 찼고, 오열과 통곡이 들끓었다. 그와 같은 정치인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이 서글픈 확신은 그의 마지막 길을 쉬이 놓아주지도 못한다. 그가 고이 잠든 리무진이 지나가는 순간 내가 마지막으로 울부짖은 한 마디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였다. 그러나 대한문 시민 분향소에서 하루 종일 울려 퍼졌던 김광석의 <부치지 못한 편지>의 가사처럼, 이제 나는 그에게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라고 말해줘야 한다. 바보 대통령 노무현, 그대 잘 가라. 그러나 당신은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당신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당신은 우리의 역사가 됐다는 것을. 분향소를 찾은 수 백 만 명의, TV를 보며 애도했던 수 천 만 명의 시민들은 셈을 쫓는 머리가 아니라, 이 뜨거운 가슴에 당신을 묻었다는 것을. 당신은 죽지 않았다.



덧글
지나느니 2009/09/28 20:59 # 삭제 답글
뒤늦게 우연히 글을 읽게 됐습니다. 참으로 아프게도 쓰셨네요. 슬픔이 가신 게 아닌가 보네요, 다시 살아납니다...